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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생각해 보는 3.1 운동 101주년, 경술국치 110주년의 역사적 의미 되새겨야

정병기 칼럼니스트 기자

입력 2020-02-10 16: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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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서울장안은 물론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울려 퍼졌다. 일제가 당황했고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했지만 진압할수록 더욱 세차게 목숨을 받치며 항거했다. 이 만세의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고 약 35년간의 일제강점기 동안 치열하게 벌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고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당시 일제는 총독부를 앞세워 민족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해 가두고 가혹한 형벌에 처형했다. 그러나 형무소로 가는 행렬은 나날이 늘어났고 서울인 경성에는 서대문형무소와 악명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가 있었는데 당시 중범이나 악질로 분류하여 마포 경성형무소로 보내 강제노역과 온갖 박해와 고문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옥사를 하게 만든 역사의 현장이 바로 마포 경성형무소이다. 이제는 민족정체성을 찾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때라고 본다. 그리고 서울에 남아 있는 3.1 운동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장소들을 살펴본다면 3.1 운동 하면 대표적인 역사적인 장소로는 종로 탑골 공원을 꼽을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과 학생들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기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수많은 인파에 폭력투쟁으로 변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제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태화관(泰和館, 요릿집 명월관의 분점)에서 낭독했다고 한다. 이때 학생들은 기다리던 민족대표들이 오지 않자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민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3.1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후 일제의 휴교령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민족저항운동을 막고 주동자들을 가두기 위해 이미 1908년 일제는 반일세력을 수용하기 위해 현저동에 ‘경성 감옥’을 설치한다. 1912년 경성 감옥은 마포구 공덕동으로 이전했다. 현저동의 기존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불리게 되었고 1923년에 ‘서대문 형무소’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당시 1919년 3.1 운동 당시 수감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수감자는 약 3천여명 이상으로 시위관련자는 1천 6백여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3.1 운동은 국내와 국외의 상황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 일어났으며 적지 않은 영향도 주었다고 한다. 당시는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직후로 ‘반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고 이런 세계적인 흐름은 대한제국 백성들에게 희망을 심어줬으며 국내에서는 고종 황제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백성들 사이에 ‘일본이 고종황제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성남 민심은 일제를 향해 독립전신과 의지로 대항하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일제는 3.1 운동 이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통치 방식을 바꾸게 되었고 민족 지도자들은 체계적인 민족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했으며 백성들은 국외로는 다양한 외교적 활동, 의거활동, 무장독립투쟁 등을 전개하고 국내에서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나 북간도로 보내게 되었고 사회, 문화, 경제적 민족운동이라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일제와 맞서게 되어 일제가 조선식민지 통치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민족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치거나 희생하신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발굴되지 못하거나 조명을 받지 못해 안타깝다. 해방이후 친일적폐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군정과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바램에 지금까지 친일청산은 고사하고 미발굴독립운동가들이 인정도 받지 못하고 빛을 보지 못해 후손들이 잊어지고 빛바랜 희생을 보며 가슴을 치고 눈물 흘리고 있어 이제는 정부가 나서 독립운동가 발굴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